제주에서의 보름 살기가 마무리되던 12월 초, 주홍빛 노을로 진하게 물들던 애월의 바다를 뒤로 한 채 화순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던 중 사무국 스태프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서로의 근황과 요즘의 몸 상태 등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래도, 프린지(가제)’에 들어갈 기획팀 스태프의 에세이를 부탁받게 되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지만 동시에 문득 수화기 너머로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지난 2020년,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일생일대의 심각한 번아웃을 경험했다. 작년이 유독 많은 사람에게 힘들었던 한 해였을 테지만, 나 역시 갑작스러운 주변 환경의 변화로 인해 새롭게 꿈꾸었던 삶의 축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결국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의 연속으로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 주위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으며 나 자신을 아프게도 했다. 그러던 그해 겨울, 프린지로부터 2021년의 축제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나에게 20대의 소중한 기억이 남아있는, 언제나 그리움이 묻어있는 곳. 그래서일까, 그간의 좋았던 기억들마저 지금의 나로 인해 혹시 전부 해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현재의 내 상태로 처음부터 선뜻 같이하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걱정을 안고 여러 스태프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긴 생각과 고민 끝에 축제 사무국 스태프로 함께해보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 프린지가 주었던 무수한 감각들이 어느 쪽으로든 나를 자극하고 일으켜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6년 이후 꼭 5년 만에 현장에서 프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11년 인디스트를 시작으로 횟수로는 5번째였고, 30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함께하는 프린지이기도 했다. 여러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점에 서게 된 나는 나름의 의미심장한 마음을 담아 마자용에서 레아로 닉네임도 바꾸며, 평생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한껏 쪼그라든 마음의 주름들을 하나하나 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초반의 사무국 회의에서 주목했던 올해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축제 공간을 문화비축기지에서 서대문구와 마포구의 민간 문화예술공간들로 이동했다는 점이었다. 공간을 변경하는 것은 그간의 축제 방식이나 운영 등 기존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 큰 이슈였기 때문에, 사무국에서는 공간을 옮겨야만 하는 합당한 타당성과 이유에 대해 여러 번의 토론을 지속해서 이어나갔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쉽사리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올해의 경우, 작년과 다름없이 국가에서 관리하는 문화예술공간의 운영 규제가 엄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축제를 준비하기에는 힘들 것 같다는 내부의 의견이 공간 이동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또한 올해를 빌어 몇 년 전부터 사무국 내부에서 제안되었던 외부 문화예술공간과 새로운 연계와 더불어 관련 네트워킹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렇게 오랜 논의 끝에 올해에는 총 10곳의 민간 문화예술공간들과 8월 한 달간 함께 축제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서 의논되었던 부분은 축제 진행을 온라인이 아닌 전면 오프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프린지뿐만 아닌 다른 문화예술 관련 플랫폼들에서 이미 비대면의 방식으로 작품 발표를 진행하고 있는 사례가 꽤 많았고, 그로 인해 예술가와 관객 모두 익숙하지 않은 창작 및 관람 환경으로 지쳐있었던 시기라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비록 지난 축제보다는 제한된 규모에서 적은 수의 관객이 함께할지라도 모두가 눈을 마주치고 함께 호흡하는 축제 현장을 만들어보자는 데에 사무국 스태프 모두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초반 설계를 위한 회의 이후 3월부터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올해에는 새롭게 여러 공간에 협력을 제안하고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고 결정짓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다 보니, 이후의 계획들이 다소 촉박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아티스트 모집부터 참가설명회, 오리엔테이션, 공간 투어, 아티스트 인터뷰, 타임테이블 배치, 공간 운영자들과의 네트워킹, 기술미팅, 인디스트들과의 사전활동까지. 빽빽한 일정 속에서 기획팀인 올라와 나는 모든 계획이 뒤처지지 않도록 서로를 끌어당기며 속도를 내었고,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가다 보니 어느샌가 축제 개막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숨 쉴 틈 없는 바톤터치로 목이 마르고 숨이 찼지만, 우리가 그려왔던 여름의 축제를 곧 있으면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신발 끈을 동여맸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될 것만 같았던 달리기는 축제가 시작된 지 단 3일 만에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사무국 스태프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밤새 뜬눈으로 야속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도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예정대로 축제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는 일순간 형용할 수 없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 속에 기획팀 스태프로서 직면했던 처음의 감정은 죄스러움이었다. 예기치 못했지만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순간과 대면하게 되면서, 미안함과 원통함, 답답함과 부끄러움이 앞선 감정과 함께 너울이듯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였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 그려왔던 수많은 계획이 변경되고 사라지고 무너져내리는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엉켜버린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나를 포함한 사무국 스태프들은 축제가 재개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상황을 해결해가며 남은 여름을 겨우 살아내었다. 정신없이 8월의 축제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계속해서 연장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격주 단위로 주시하며 일정이 연기된 작품을 모아 프린지ING를 진행했고,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1의 모든 프로그램은 11월 셋째 주가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어김없이 돌아온 겨울의 초입에서 적막함이 가득한 제주의 202번 시내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잠시 한 켠에 묻어둔 분주하고 치열했던 지난 계절을 다시금 꺼내어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순간들을 점들로 만들고 선으로 이어보며 프린지의 24번째 페이지에 어떤 그림으로 남겨질지 상상해보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래봤자 반쪽짜리 그림 아니겠냐고.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그림이지 않느냐고. 물론 처음에 그려놓았던 의욕 충만한 밑그림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남겨진 여백이 많아 보여도 삐뚤빼뚤 구부러져 보여도 결국에는 엄연히 하나의 그림이 되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이 올해의 아티스트와 인디스트, 관객들과 스태프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묵묵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아직은 진짜로 잘 모르겠다,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그려낸 그림이 그저 무모했던 시도였는지, 혹은 의미 있는 도전이었는지. 그 해답은 왠지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